[신재완 칼럼] 옥마산 발원, 궁말 지나는 궁촌천

주간보령 | 입력 : 2025/01/07 [12:39]

대천에서 남포로 가는 길에는 행복한 웨딩홀이 있는데, <궁촌천> 입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궁천교 아래는 사철 소리 내며 궁촌천이 흐른다. 천은 옥마산 바로 아래 윤창암(閏昌庵)이 있는 고마니샘에서 발원하여 고야실, 원창, 창동, 북정자, 으름내, 맷독골, 궁말을 지나 대천천 하류와 합쳐 서해로 흘러든다.

 

총연장이 5km 남짓 비교적 짧지만 높은 옥마산(600.8m)을 배경으로 물이 사철 넘쳐난다. 하천은 남포면과 명천동 및 궁촌동을 가르는 경계가 되는데, 남포현과 보령현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 옛날 보령현에서 남포현으로 가려면 이 천을 건너야만 하는데, 물이 불어나면 대천천보다 폭이 좁았지만 이 천을 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대천천은 한내돌다리가 있어 쉬이 넘을 수 있지만 궁촌천은 그러한 다리가 놓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궁촌을 지나기에 궁촌천이라 부르는데, ‘궁촌혹은 궁말이라는 마을은 살림이 궁핍한 주민이 많이 살았다거나 의 땅이 있어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물소리 들으며 냇둑 걷기의 즐거움

 

내의 폭은 그리 넓지 않지만 물이 많고 경사가 있어서 그런지 흐르는 물소리가 자못 정겹다. 물소리 들으며 냇둑을 걷는 것이 참 즐겁다. 옥마산 바라보고 천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엔 해너물들이고 오른쪽은 창동들이 넓게 펼쳐진다. ‘해너물들해가 떠올라 한낮에 들의 곡식을 여물게 하다가는 저녁 때 서해로 저문다.’하여 불렀고, 창동들은 남포현의 사창(社倉)이 있었기에 그리 이른 모양이다. 양쪽들에는 온갖 새가 연신 들고 날아오른다. 궁촌교에서 시작된 냇둑 걷기를 500m 올라오면 맷독골 마을이다.

 

마을 중간에 회관과 사각형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 회관에는 <명천 3>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다. ‘맷독골이라는 다정한 동네 이름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아쉬움을 준다. 맷독골에는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연자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성주산 바라기재 넘어 성주 사람들까지 여기 방아를 찧으러 왔다고 한다.

 

으름내 한 마을! 남포뜸, 양지뜸 두 동네!

 

냇둑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길과 내가 함께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는 창동교가 들어서 있다. 다리에서 양쪽으로 길과 내가 갈라지는데, 오른쪽은 농장과 창동들로 들어가는 길이고 왼쪽은 으름내로 드는 길과 냇물이다. 으름내를 보통 명천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똑같이 부른다. 으름내는 울음내에서 왔을 것으로 보아 그리 한자로 표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할 때 명암(鳴巖)과 이천(伊川)의 두 마을이 합쳐져 명천리(鳴川里)가 되었다고 한다.

 

이천(伊川)은 본래 이을음천(伊屹音川)이라는 동네 이름을 간단히 줄인 것이고, ‘이을음이란 말의 뜻은 한자의 음()만 따온 것으로 특정한 지역 범위의 가장자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보령현의 남쪽 가장자리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천이 항상 물소리 내며 흐를 정도로 양이 많고, ‘울음내라는 말도 여전히 동네에서는 마을 이름으로 사용하기에, 울음처럼 소리가 들리는 명천리, 명천동(鳴川洞), 명천폭포가 적격으로 들린다.

 

으름내로 들어서면 또 다시 내가 두 갈래로 물길이 갈라지는데 옥마산을 보고 왼쪽 으름내에 들어선 작은 동네는 양지뜸’, 오른쪽은 남포뜸이라 칭하고 행정구역도 각기 명천동, 남포면으로 서로 다르고 초등학교 학군도 서로 다르다. 60년대까지만 하여도 두 동네가 서로 상대하여 지불싸움을 벌리기도 하였고, 양지뜸은 한내초등학교에 남포뜸은 남포초등학교로 학구가 서로 달랐다. 같은 마을에 행정구역이 각기 다른 두 동네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문구 출생지 명천!

 

왼쪽 양지뜸에는 관촌수필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이문구가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그의 호가 명천(鳴川)인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관촌수필 내 日落西山편에 동산 등성이로 오를수록 내가 첫돌을 맞은 뒤로 십팔 년 동안이나 살았던 옛집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첫돌 이후에 갈머리에 살았다고 하여 그가 태어난 곳은 정작 다른 지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바로 여기 명천(으름내)이고 그의 호가 명천인 것도 새삼 특기할만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출생지가 여기에 있게 된 까닭은 그의 조부 이긍직이 일제강점기 시절 군산 미두시장에 드나들면서 관촌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갈 정도로 파탄이 났고, 그의 아들 이익규가 남포 용머리 재산가 경주 이씨네로 장가들면서 처가의 도움으로 으름내에 집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문구가 여기 명천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문구가 첫돌 지나면서 다시 원래 집과 재산을 되찾고 본래 터전 갈머리로 들어선 내력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갈머리 집의 등기부등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으름내가 시작되는 옥마산 기슭은 완만하게 내려오다 으름내 마을 뒤에서 잠시 봉우리가 솟아올랐는데 바로 으름내산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저 동산이라고 부른다.

 

역동 창동! 패러글라이딩, 북정자, 옥마 남포선, 산 넘는 농업용수도

 

오른쪽 으름내의 둑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천국가대표라 씌어 진 넓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들어서 있다. 높은 옥마산 정상에서 점프하여 내려오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인 것이다. 으름내에서 옥마산을 배경으로 오색의 패러글라이더가 여기 활공장을 향하여 빠르게 혹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호쾌하고 시원하다. 냇둑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면 북정자 마을이다.

 

그 옛날 남포에서 보령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있어서 그리 불렀다고 한다. 서쪽의 봉덕북정자 마을과 대비하여 창동북정자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 마을에는 1916년 부임한 보령군수 김옥균의 양아들인 김영진이 남포 객사 건물을 헐어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집은 보이질 않는다. 내는 마을을 지나 발원지와 가까운 고야실로 이어진다. 고야실로 들어서는 길에는 철길이 가로 놓여 있다.

 

성주탄전의 무연탄 수송을 위해 화물 전용 철도인 남포선(1964.11.30. 완공, 남포옥마, 4.5km)이 동서 가로로 지나는 것이다. 지금은 폐철로가 되었지만 당시 힘들게 지은 철교와 건널목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그 옛날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던 영화를 증언하는 듯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물굴표시가 보인다. 창동농업용수 수도(倉洞農業用水 隧道, 1977. 5 준공 성주 개화리에서 남포면 창동리로)가 있다. 여기 경작지가 고도가 높아 물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는데 이 물굴로 저 넓은 들녘을 넉넉히 적셔주고 있다.

 

기도 발 잘 듣는 고마니샘!

 

내는 산을 향해 급격히 올라가기에 흐르는 물은 더 가쁘게 내려오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고야실 마을 들어가는 곳에는 21, 77, 36번 국도가 겹쳐지는 외곽도로가 높다란 다리 위로 지난다. 내는 고야실 마을 중앙을 관통하여 옥마산 깊숙이 들어간다.

 

막다른 발원지가 가까워진 그곳에는 영험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왼쪽으로 금륜사라는 절집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경순왕영모전이 들어서 있다. 경순왕영모전의 앞뒤 기념비에는 우리 지역의 선출직 공직자로 이름 있는 사람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용환 의원, 김태흠 지사, 김동일 시장 등도 보여 경주김문의 역량 있는 분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으름내 발원지 고마니샘은 고야실과 금륜사 및 경순왕영모전을 지나 돌무더기가 널부러진 깊은 계곡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었다.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들더니 발원지는 바로 눈앞이다. 사방 높은 나무와 가시덤불이 덥혀 있어 접근이 어렵다. 뒤에는 윤창암이 떡 버티고 있다. 어느 돈 많은 이가 아들 얻기 위해 이 깊은 산중에 기도암자를 조성하고 소원하였다지. 기도 소리가 하늘에 잘 닿는 곳이다.

 

나도 세상의 화해와 공정 그리고 보령의 문화 창달을 위해 두 손을 모아본다.

(글쓴 이 : shinjo20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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